프롤로그
2억 3천만 달러. 한화 약 3,500억 원. 중국 애니메이션 ‘강자아’가 거둔 박스오피스 수익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거장은 ‘나의 붉은 고래’에도 참여했던 감독, 웨이 리입니다. 극장에서 수천억을 벌어들인 그가, 2026년 칸 영화제에 들고 온 신작은 뜻밖이었습니다. 거대한 스튜디오도, 수백 명의 애니메이터도 아닌 AI였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칸의 영화 비즈니스 마켓(Marché du Film)에서 공개된 AI 애니메이션, ‘Born of the Tide, 조류의 탄생’입니다.
사라진 종족, 4K로 부활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중국 남부 해안에서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온 ‘탄카족’입니다. ‘바다의 유목민’이라 불리지만, 정작 영화로 만들어진 적은 거의 없는, 기록에서 지워진 민족입니다.
감독 ‘웨이 리’는 이들의 세계를 4K 스케일로 되살렸습니다. 계단식 양식장과 에메랄드 빛의 바다, 대나무 뗏목을 저어 나가는 어부들, 수상 가옥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아이들. 용선 경주와 거대한 어시장, 산악 전투까지. 과거라면 수백 명의 인력과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장면들입니다. AI는 사라질 뻔한 한 종족의 문화에 얼굴을 돌려주었습니다.
AI로 만든 영화가 아니다
흥미로운 건 AI에 관한 감독의 생각입니다. 그는 이 작품을 ‘AI 영화’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칸 패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단지 AI로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AI 워크플로우만 따른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통 애니메이션 기법을 함께 씁니다.”
그가 강조한 건 결과물의 출처가 아니라 효율이었습니다. AI를 도입해 제작 기간을 기존의 3분의 2로, 예산도 3분의 2로 줄였다는 것이죠. 기술은 스펙터클을 정복했지만, 아직 사람의 눈빛 앞에서는 머뭇거립니다. 그래서 거장들은 여전히 AI를 ‘대체’가 아니라 ‘보조’라고 부릅니다.
2026년 칸, 모순의 문
2026년 칸 영화제는 묘한 이중 신호를 보냈습니다. 79회 칸은 생성형 AI로 만든 작품을 황금종려상 공식 경쟁에서 배제했습니다. 인간의 창작 경쟁은 인간의 몫으로 남겨두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간 세계 최대 규모의 필름 마켓인 칸의 ‘마르셰 뒤 필름’에서는 AI가 중심 무대에 섰습니다. ‘Born of the Tide’가 공개된 곳이 바로 그 곳이었고, 1,000편 넘는 출품작 중 21편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정됐습니다. 한쪽 문은 닫고, 다른 쪽 문은 활짝 연 셈이죠.
예술의 전당은 AI를 거부했지만, 산업의 시장은 AI를 환대했습니다. 이 모순이야말로 지금 영화 산업이 AI를 대하는 솔직한 초상입니다.
편견이라는 또 하나의 파도
작품을 향한 반응도 두 갈래로 갈렸습니다. “이건 더 이상 신기한 장난감이 아니다. 이건 영화다.” 한쪽에선 이렇게 감탄합니다. 다른 한쪽에선 “할리우드 수준엔 한참 못 미친다”, “새의 날갯짓에 깨진 픽셀이 보인다”고 혹평합니다. 심지어 영상 속 동양적 세계관을 두고 엉뚱한 정치적 해석을 다는 댓글까지 달렸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호불호 논란과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이 작품의 주요 엔진인 클링은 이미 224개국에서 6,000만 명이 쓰는 핵심 AI 생성 도구입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왜 누구는 칸에 서고, 누구는 ‘AI 슬롭’이라 조롱받을까요?
차이는 도구가 아니라 무엇을 비출것인가를 고민하는 감독의 선택입니다. 웨이 리는 최신 기술로 가장 오래되었고, 잊혀진 사람들을 비췄습니다. 대부분이 화려한 SF와 액션에 AI를 쓸 때, 그는 사라지는 문화를 택했습니다. 편견의 파도가 거셀수록, 아무도 가지 않는 방향에 빈자리가 있는 법이니까요.
에필로그
‘Born of the Tide’는 완벽한 걸작은 아닙니다. 스타일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클로즈업의 어색함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AI가 사라진 문화를 대서사극의 스케일로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도구가 아니라, 무엇을 비출지 아는 안목이 AI 영화의 미래라는 것도 알려 주었죠.
관심경제 시대, 6,000만 명이 똑같은 AI를 손에 쥐었습니다. 도구의 격차는 사라졌습니다. 남은 건 관점의 격차뿐입니다. 거장을 거장으로 만든 건 더 빠른 렌더링이 아니라,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내 붙든 시선이었으니까요.
편견이 외면한 자리를 먼저 비추는 자만이, 관심경제의 다음 파도를 탑니다. 파도는 누구에게나 옵니다. 다음 파도에서 태어날 이야기가 당신의 것이기를. 증폭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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