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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이야기를 모른다] 제 4화. 라이온킹은 햄릿이다

라이온킹은 햄릿이다
제 4화. 라이온킹은 햄릿이다

나는 2015년부터 기계에게 이야기를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엔씨소프트에서 8년, 지금은 KT 미디어본부에서. 직함과 회사는 바뀌었지만 붙들고 있는 질문은 같다. AI는 정말 이야기를 아는 걸까.

AI가 글을 척척 써주는 시대가 됐지만, “그럴듯한 글”과 “좋은 이야기”는 다른 말이다. 그 차이를 현장에서 직접 부딪으며 10년을 보냈다. 이 연재는 그 시도와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의 기록이다.

이 칼럼은 룰베이스 시대의 실험부터 LLM 등장 이후까지를 다룬다. AI 글쓰기 도구를 쓰면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 있다면, 혹은 창작과 기술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면, 이 기록이 그 감각에 말을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1.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스토리헬퍼 시작 화면

그림1. 스토리헬퍼 – 로그인 화면



2015년, 대학원 랩실에서 디지털 스토리텔링을 연구하던 시절, 창작 지원 도구인 ‘스토리헬퍼’를 처음 구동했을 때의 기묘한 감각을 잊지 못한다.

내가 세상에 없던 독창적인 기획이라 믿었던 시나리오를 입력하자, 시스템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미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2,000여 편의 영화 어딘가에 당신의 플롯이 있다고. 화면이 보여준 진실은 명확했다. <라이온킹>의 뼈대는 <햄릿>과 완벽히 일치했다. 왕위를 노린 삼촌에게 아버지를 잃은 왕자가 방황 끝에 복수하는 구조.

그런데 기묘하게도, 나는 한 번도 <라이온킹>을 보며 <햄릿>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주인공이 ‘사자 심바’라는 그 압도적인 디테일 하나가, 내 뇌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인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망이 아니라 흥미가 돋았다.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야기의 본질은 보편적인 구조에 있는가,

아니면 그 구조를 채우는 낯선 디테일에 있는가.’

학부 시절부터 디지털 스토리텔링에 매료되어 있던 나에게 이 질문은 거대한 자석 같았다. 스토리를 구조화하고 데이터화해서 조립하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공식에 닿을 수 있을까. 스토리헬퍼는 그 질문에 가장 정직하고 학문적으로 응답하려 했던 시스템이었다.

2. 흥미로움과의 거리를 계산하다

스토리헬퍼의 전제는 단순하고도 강력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오직 새롭게 느껴지는 담화만 있을 뿐이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이화여대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소와 엔씨문화재단은 3년간 천재들의 변덕스러운 영감을 해부했다. 2,000여 편의 명작 영화들을 3막 8장 16시퀀스 36에피소드 110개 장면으로 쪼개고, 장면마다 인물의 상태변수, 욕망, 모티프, 시스템 동사의 인과율 등을 촘촘히 태깅했다. 구축된 데이터베이스 요소만 11만 건이 넘는, 그야말로 콘텐츠계의 ‘팔만대장경’이었다.

이제 사용자가 질문에 답할 차례다. 인물의 신분, 직업, 욕망, 결혼 여부 등 29개의 항목을 채워 넣으면 시스템은 결과를 내놓는다.

당신이 입력한 줄거리는 <늑대와 춤을>과 87% 유사합니다.”

이 한 줄에 서비스의 위대함과 한계가 동시에 압축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흥미로운가?’라는 주관적이고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이 이야기는 검증된 명작과 얼마나 닮았는가?’라는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질문으로 치환한 것이다. 흥미로움을 직접 정의하는 대신, 흥미로움과의 거리를 계산했다. 그 거리를 좁혀가면 언젠가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스토리헬퍼 진행화면 1

그림2. 스토리헬퍼 – 영화 모티브 분석 화면



3. 기술은 어디에서 패배했는가

그러나 정교한 설계도와 달리, 실제 현장의 작가들은 이 도구 안에서 좀처럼 숨을 쉬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창작자의 본성과 도구의 방향성이 달랐기 때문이다. 작가는 본질적으로 발산하는 존재다. 그러나 스토리헬퍼는 기존의 안전한 구조를 선택하게 한 뒤 그 안을 채우라고 요구하는 수렴의 도구였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창조적 주체성이 흐려지는 순간 창작은 멈춘다.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번역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 흥미는 꺾인다.

두 번째는 가파른 진입장벽이었다. 스토리헬퍼는 서사 이론에 대한 이해 없이 다루기엔 결코 만만한 도구가 아니었다. 모티프의 대변화와 소변화, 인과율 단위, 시스템 동사 같은 인지과학적 개념들. 작법론을 전문적으로 익히지 않은 일반 창작자에게 이 정교한 시스템은 그저 통과하기 지루한 복잡한 설문지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지쳐 나갔다.

셋째, 가장 결정적인 아쉬움은 ‘0.1%의 상상력’ 영역에서 일어났다. 구조를 빌려와도 그 안을 채우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었다. 시스템이 햄릿의 완벽한 3막 구조를 손에 쥐여준다 한들, 왜 주인공이 호랑이나 늑대가 아니라 사자여야 하는지, 그 사자가 왕국을 떠나 벌레를 먹으며 버티는 디테일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룰베이스 연산은 구조의 유사성은 잴 수 있었지만, 디테일이 뿜어내는 상상의 도약까지 계산해내지는 못했다.

라이온킹을 라이온킹으로 만드는 것은 햄릿의 구조가 아니다. 주인공이 사자라는 그 한 줄이다. 그리고 그 한 줄은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오지 않는다. 당시 개발진의 말대로 스토리라인을 잡는 노력이 전체 창작의 ‘5%’라면, 구조를 배당받은 후 이야기를 진짜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나머지 ‘95%’의 어렵고 핵심적인 작업은 여전히 작가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좋은 이야기를 해부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해부 결과로 좋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4.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스토리헬퍼 진행화면 2

그림3. 스토리헬퍼 – 시퀀스 구성 & 유사 플롯 검색


스토리헬퍼를 만든 사람들이 이 한계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당시 연구 책임자는 서비스 출시 인터뷰에서 이미 선을 그었다.

이 프로그램만 가지고 전체 스토리를 다 쓸 수 있다거나,

이것만 사용하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작업을 도와주는 비서 같은 프로그램이다.”

그는 플롯 패턴의 한계를 인정하며, 작품성이란 결국 플롯이 아니라 캐릭터와 상황 등의 조합이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완벽한 플롯 구조를 제안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독창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고백이었다.

연구 문서에는 더 솔직한 문장이 남아 있다.

스토리헬퍼는 작가의 절박한 임무 앞에 기술이 패배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작가들이 실제 작업하는 순서 그대로 프로그램화하고자 했다.”

‘기술이 패배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인공지능이라는 메스로 과거의 서사를 완벽하게 해부해 보여줄 순 있어도, 그 해부도를 이어 붙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스토리헬퍼가 마주한 벽은 유사도 계산의 정밀함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과거의 흥미로움을 정형화하여 모방하면 새로운 흥미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패러다임 그 자체에 있었다. 데이터베이스는 과거의 정답을 보여줄 뿐, 왜 주인공이 사자여야 하는지 같은 ‘맥락의 도약’을 스스로 제안하지 못한다.

결국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기성 구조의 복제가 아니라, 그 구조를 배반하고 비트는 창작자의 고유한 시선이었다. 기술은 그 도약의 순간을 채워줄 수 없었고, 스토리헬퍼는 2023년 8월 조용히 서비스를 종료했다.

그 실패와 한계를 현장에서 함께 목격하며, 우리는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했다. 거대한 전체 플롯을 먼저 짜놓고 작가를 가두는 방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래서 후속 프로젝트였던 <스토리타블로>에서는 정반대의 접근을 시도했다. 구조를 먼저 강요하는 대신, 장면을 순차적으로 쌓아가며 이미지와 함께 스토리를 유기적으로 보조하는 새로운 창작 방식을 설계하고자 했다.

모방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려 했던 이 시도 역시 아쉽게도 정식 출시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실패의 기록 속에서 우리는 기계에게 이야기를 가르치는 일의 본질을 조금씩 다시 쓰기 시작했다.

5. 벽 앞에서, 질문은 이어진다

스토리헬퍼의 퇴장은 하나의 서비스가 멈춘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서사를 데이터화하고, 과거의 모방을 통해 흥미로움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유령처럼 반복되고 있다.

학계에서, 산업 현장에서, 그리고 내가 오늘날 요청받는 수많은 AI 사업 기획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저마다 최신 거대언어모델(LLM)의 이름을 외치며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지금의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운 문장을 순식간에 생성해내지만, 과거의 무수한 텍스트를 통계적으로 모방하여 ‘그럴듯함’을 구현한다는 본질만큼은 10년 전 스토리헬퍼 시절과 다르지 않다. 기계는 여전히 구조와 확률을 계산할 뿐, 왜 이 이야기가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지 그 본질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벽 앞에 서 있다. 기존의 이야기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자 심바’라는 0.1%의 도약 앞에서 말이다.

다음 회에서는 스토리헬퍼가 남긴 이 패러다임의 벽을 넘기 위해, 산업 현장에서 시도되었던 또 다른 발버둥을 들여다본다.

「AI는 이야기를 모른다」는 AI매터스에서 격주 수요일마다 연재됩니다.


Reference

– 스토리헬퍼 / 스토리타블로 공식 자료 (2013~2023)

게임메카, 「엔씨표 스토리 창작 프로그램 ‘스토리헬퍼’는?」

인벤, 「스토리헬퍼 후속작 스토리타블로 선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