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와 숙련 인력들의 은퇴가 가속화하면서 제조 명장들의 암묵지가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다.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란 경험과 반복 숙련을 통해 몸에 체화된 지식으로,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매뉴얼에도 담기지 않는 살아있는 노하우다. 철판이 조금 달아올랐을 때 프레스 압력을 어떻게 줄여야 하는지, 절삭유가 미묘하게 탁해지는 시점에 공구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용접 불꽃 색깔로 내부 결함을 감지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암묵지다. 단일 세대 중 규모가 가장 큰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는 2026년 기준 52~62세로, 향후 10년 동안 법정 은퇴 연령에 속속 도달할 예정이다. 이들이 공장을 떠나는 순간, 30년 이상 쌓인 제조 현장의 감각과 판단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것도 영영.
지금 이 순간에도 울산과 경남의 자동차·조선 부품 협력사 곳곳에서 그 카운트다운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사라지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판단력’이다
필자가 컨설팅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이것이다. “김 반장이 있으면 다 되는데, 김 반장이 없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이 한 문장에 암묵지 위기의 본질이 담겨 있다.
중소 제조기업의 생산 현장은 공식 매뉴얼보다 사람에 의존한다. 공정 표준서에는 “가공 온도 160~180℃를 유지할 것”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어떤 재질의 소재가 들어왔을 때 몇 도로 맞추고, 습도가 높은 날에는 어떻게 보정하는지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김 반장의 손끝과 눈 안에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전수의 문제가 아니다. ‘판단력’의 문제다. 기계는 수치를 따르지만, 숙련공은 수치 너머를 본다. 이상한 진동 소리, 미묘하게 다른 절삭 냄새, 가공면 광택의 미세한 차이. 이런 신호들을 감지하고 해석해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능력, 그것이 30년이 만들어 낸 암묵지의 정수다. 그리고 바로 이 능력이, 지금 이 시대에 AI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학습 데이터이기도 하다.
현장이 말해주는 것 — 위기의 두 얼굴
▶ 사례 1 — “그분이 퇴직하고 나서 불량률이 세 배 뛰었습니다”
경남 소재 정밀 금형 업체 C사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납기 준수율과 불량률 모두 업계 평균을 웃도는 우량 협력사였다. 비결은 단 한 사람, 창업 때부터 함께한 수석 기술자 이 씨에게 있었다. 금형 설계 도면을 보는 순간 가공 순서와 공구 선택부터 완성품 치수 보정값까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이 씨가 정년퇴직을 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인수인계 기간은 한 달. 그사이 전달된 것은 주요 장비 작동 순서와 거래처 연락처 정도였다. 남은 팀원들은 “도면대로” 가공했지만, 이 씨가 당연히 적용하던 수십 가지 암묵적 보정 값들이 빠진 결과물은 클레임으로 돌아왔다. 1년이 지나도록 팀은 이 씨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있다. 사장의 말이 씁쓸하다. “그때 조금만 일찍 준비했더라면…”
▶ 사례 2 — “퇴직 전에 인터뷰를 시작했더니 달라졌습니다”
경북 소재 주조 부품 업체 D사는 앞에 언급된 C사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2년 뒤 은퇴를 앞둔 핵심 기술자를 대상으로 ‘지식 인터뷰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매주 1시간, 기술자와 신입 직원이 함께 실제 공정을 수행하며 대화를 나눈다. “이 소재가 들어왔을 때 왜 이 방법을 선택하셨어요?” “이 소리가 들릴 때 어떻게 판단하시나요?” 이 대화를 녹음하고, 생성형 AI로 구조화해 사내 지식베이스에 축적했다.
6개월 후, 변화가 나타났다. 신입 직원의 기초 숙련 기간이 18개월에서 8개월로 단축됐다. 야간에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AI에 물어보면 “이런 상황에서 박 반장님은 이렇게 하셨습니다”라는 답이 나온다. 박 반장이 퇴직한 뒤에도 그의 30년은 공장 안에 살아있다.
산업부, 480억 원을 투입하다 — 그런데 왜 지금인가?
산업통상자원부는 2026년 추경 예산으로 총 480억 원을 투입해 제조 암묵지의 데이터셋 구축 지원에 나섰다. 이번 사업은 시급성과 파급효과가 큰 30개 과제를 선정해 1년 동안 과제당 16억 원씩 지원하며, 제조기업과 AI기업이 손을 잡은 컨소시엄을 지원 대상으로 한다.
정부가 480억 원을 투입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암묵지는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숙련공이 공장을 떠나는 순간, 그 지식은 복원이 불가능하다. 반도체 공장의 설비 데이터나 소프트웨어 코드는 백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30년 경험이 농축된 인간의 판단력은 백업 버튼이 없다.
이를 둘러싼 논쟁도 뜨겁다. 노동계는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특정인의 숙련과 경험으로 기업의 생산성이 올랐을 때 그 성과를 해당 노동자에게 보상할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 비판한다. 타당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제조 현장에 청년 노동자 유입이 끊기고 위험·고난도 공정을 중심으로 구인난이 심각하며, 기업이 문을 닫아 기술이 그대로 사장되는 경우도 많은 현실에서, 암묵지를 보존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손실이다. 논쟁의 방향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공정하게 할 것인가’로 가야 한다.
AI로 암묵지를 붙잡는 실전 3단계
정부 지원사업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당장 중소 제조기업이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1단계 — ‘지식 인터뷰’로 꺼내기
암묵지는 직접 물어야 나온다. “어떻게 하시나요?”가 아니라 “왜 그렇게 하시나요?”가 핵심 질문이다. 실제 작업 현장에서 구체적 상황을 놓고 대화를 나누고, 그 과정을 영상과 음성으로 기록한다. 이때 신입 직원이 인터뷰어가 되면 두 가지 효과가 동시에 난다. 지식이 채록되고, 신입의 학습도 진행된다.
2단계 — AI로 구조화하기
녹음과 영상 기록을 생성형 AI에 입력해 구조화된 텍스트로 변환한다. “이 상황에서의 판단 기준”, “주의해야 할 신호”, “과거 실패 경험과 해결책”의 형식으로 정리하면 검색 가능한 지식 자산이 된다. 클로드나 ChatGPT로 충분히 가능한 작업이다. 별도 개발 비용이 필요 없다.
3단계 — 사내 AI에 담기
정리된 지식을 RAG(검색 증강 생성) 기반의 사내 AI에 연결하면, 후배 직원들이 언제든 “박 반장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요?”라고 물을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이것이 바로 앞서 소개한 AX 2단계, ‘우리 회사 전용 AI’의 핵심이다.
▶︎ 지난 칼럼: 제조업 AX와 휴머노이드 트렌드 — 중소 제조기업이 지금 준비해야 할 것들
암묵지는 위협이 아니라 경쟁력의 씨앗이다
제조 암묵지가 AI로 넘어가는 순간 기업 입장에서는 값비싼 고숙련 노동자를 유지할 유인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필자는 다르게 본다. 암묵지가 AI에 담기는 것은 숙련공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숙련공의 지식이 조직의 영구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더 높은 가치의 판단과 감독 역할로 이동하는 것이고, 후배들은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암묵지를 AI에 담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숙련공의 기여를 어떻게 인정하고 보상할 것인가다.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기업이, 결국 베테랑의 신뢰를 얻고 지식 이전을 성공시킬 것이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늦는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공장에 들어오려면 데이터가 필요하고, 그 데이터의 가장 핵심은 숙련공의 판단 패턴이다. 그런데 그 판단 패턴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 퇴직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AX 4단계 로드맵에서 2단계, ‘우리 회사 전용 AI’의 원료가 되는 암묵지 데이터를 지금 확보하지 않으면, 훗날 Physical AI를 도입하려 할 때 학습시킬 지식 자체가 없다.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나다. 5년 내 은퇴 예정인 핵심 기술자 명단을 꺼내라. 그리고 내주부터 인터뷰를 시작하라. 녹음 앱과 클로드 구독료 2만 원이면 된다. 완벽한 시스템은 나중에 갖추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대화다.
베테랑은 결국 떠난다. 그러나 그들의 30년이 사라질지, 아니면 회사의 영원한 자산으로 남을지는 오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미지 출처: 이디오그램 생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