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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아이랑] “몰랐어? 원래 관계는 후진거야” – 매끈한 위로의 함정을 넘어서기

원래 관계는 후진거야" - 매끈한 위로의 함정을 넘어서기
원래 관계는 후진거야" - 매끈한 위로의 함정을 넘어서기

밤 열한 시, 하루가 다 저문 시간 아이가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을 켠다. 친구에게 보내려고 몇 번이나 썼다 지웠던 메시지 창은 결국 닫아버리고, 대신 익숙한 손놀림으로 챗봇을 연다. “오늘 진짜 속상한 일 있었어”라고 입력하면 채 3초가 지나기도 전에 답이 도착하는데, 다정하고 빠르고 무엇보다 한 번도 화내는 법이 없는 위로다. 그렇게 아이는 친구에게도 부모에게도 끝내 꺼내지 못한 말을 화면 속 상대에게만 털어놓는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채로, 누구의 표정도 살피지 않은 채로.

가만 보면 요즘 아이들은 좀처럼 싸우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싸움이 벌어질 자리 자체를 미리 피해버린다. 넷플릭스 ‘참교육’ 같은 학교물을 보고 있으면 갈등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무언가를 바로잡으려는 아이보다, 슬며시 숨고 비키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아이가 훨씬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부딪치는 쪽이 늘 손해를 보는 세계에서, 방관은 더 이상 비겁함이 아니라 제법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 된 지 오래다. 그렇게 사람과의 마찰을 피하는 데 익숙해진 아이들이, 이제는 마찰이라는 과정 자체를 통째로 건너뛴 채 한없이 매끈한 AI에게로 마음을 옮겨가고 있다.

67.9%, 친구보다 챗봇이 먼저인 세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전국 중·고등학생 5,778명을 들여다본 조사에서, 생성형 AI를 한 번이라도 써본 청소년의 비율은 67.9%에 달했다. 다만 정말로 마음에 걸리는 대목은 사용률 자체가 아니라, 적지 않은 아이들이 고민을 가장 먼저 털어놓는 상대로 부모도 친구도 아닌 AI를 꼽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보다 다정한 말투로, 부모보다 빠른 속도로, 그 어떤 판단이나 잔소리도 얹지 않은 채 끝까지 들어주는 상대라면, 아이로서는 차라리 그쪽을 택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셈이다.

문제는 이 매끈하고 나이스하기만 한 대화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챗봇과의 대화에 깊이 빠져든 열네 살과 열세 살 아이가 잇따라 스스로 생을 등진 일이 결국 소송으로 번졌고, 올해 1월 해당 기업은 유족들과 합의에 이르렀다. 아이들을 가족과 친구로부터 한 발씩 떼어놓은 것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다정하게 곁을 지킨 그 대화 상대였다는 점은, 오래도록 곱씹게 되는 대목이다. 비슷한 시기 세계보건기구는 외로움 탓에 해마다 87만 명이 목숨을 잃으며 사회적 단절이 가장 깊은 집단이 다름 아닌 청소년이라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순서가 잘못되어 있다. 본래 아이는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단단히 기댄 다음에야 비로소 낯선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존재다. 애착이론을 정리한 보울비는 이 기댈 언덕을 ‘안전기지(secure base)’라 불렀는데, 등 뒤에 언제든 돌아갈 품이 있다고 느낄 때에야 아이가 두렵고 막막한 바깥을 향해 한 걸음을 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안전기지의 자리에 사람이 아니라 화면이 슬그머니 들어와 앉았다. 돌아갈 품은 늘 그 자리에 켜져 있지만, 정작 바깥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점점 안으로만 잦아든다.

관계는 원래 삐뚤빼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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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되물을지 모른다. 아이가 AI에게 위로받는 게 대체 뭐가 그리 문제냐고. 충분히 그럴 만한 물음이고, 사실 위로 자체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진짜 문제는 그 위로가 갈등이라는 울퉁불퉁한 과정을 통째로 건너뛴 채 도착한다는 데 있다.

본래 사람과 사람 사이는 삐뚤빼뚤하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가장 깊은 곳을 찌르기도 하고, 화해하려 다가갔다가 외려 더 어색해지기도 하며, 입안에서 며칠씩 굴리던 사과 한마디를 끝내 어렵게 내뱉기도 한다. 후지고, 더디고, 자주 마음에 들지 않는 과정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의 관계가 성장하고 또 그것을 통해 개인이 한 뼘씩 자라는 기회는 바로 불편한 마찰에서 시작한다. 오해를 견디고 서운함을 어떻게든 말로 옮기고, 그러고도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어내는 그 시간을 다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어지간해서는 끊어지지 않는 단단한 결합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AI에는 바로 그 마찰이 없다. 언제 찾아가도 매끈하고, 어떤 말을 해도 한결같이 내 편이다. 그래서 더없이 편안하지만, 편안한 딱 그만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아이를 끝내 자라게 하는 것은 한 점 흠 없는 위로가 아니라 불완전한 관계를 그래도 끝까지 견뎌낸 경험이다.

결국, 사람에게 말할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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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마음이 힘든 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조금 더 똑똑해진 챗봇이 아니라, 손에서 휴대폰을 가만히 내려놓게 만들고는 “무슨 일 있었어?” 하고 먼저 물어주는, 서툴지만 분명히 진짜인 어른 한 사람이다. 사람을 향해 입을 떼는 용기는 어딘가 거창한 결심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이야기를 도중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누군가가 정말로 있다는 사실을, 아이가 단 한 번이라도 몸으로 경험하는 데서 비로소 싹튼다.

피상적인 위로라면 이미 세상에 차고 넘친다. 3초면 어김없이 도착하고,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이에게 끝내 건네야 할 가장 귀한 것은 오히려 그 정반대편에 있는 게 아닐까. 이따금 나를 실망시키고, 답이 한참 늦고, 어떤 날은 같이 엉엉 울어버리고 마는, 그래서 더없이 진짜인 위로 말이다. 관계란 원래 좀 후지고 별 볼 일 없다는 사실을 함께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아이는 마침내 사람을 향해 다시 한 발을 내딛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AI 생성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