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미래부터 그려보자
전남 해안의 한 소도시를 떠올려 본다. 한때 십만을 넘겼던 인구가 육만 명대로 내려앉은 구청 소재지, 그 오래된 상가 건물 2층에 다섯 명짜리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전국을 상대로, 어떤 분기에는 해외 고객을 상대로 사업을 한다. 대표가 아침에 노트북을 열면 밤사이 여러 에이전트가 일을 해두었다. 들어온 문의를 종류별로 분류해 두었고, 단순한 견적은 초안까지 작성해 두었으며, 경쟁사가 어제 올린 공지와 가격 변동을 표로 정리해 두었다. 대표와 직원들은 그 위에서 판단만 한다. 임대료는 강남의 십분의 일이고, 점심을 먹고 나면 삼십 분 안에 산이든 강이든 닿는다. 수도권의 주거비와 출퇴근에 삶을 갈아 넣지 않아도, 만들어 내는 일의 수준은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몇 년 전이라면 공상에 가까웠을 장면이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적으로 막힐 데가 거의 없다. 인간이 모든 단계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아도 스스로 굴러가는 에이전트 생태계가 업종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자리 잡으면서, 작은 팀이 어디에 있든 예전 같으면 큰 조직이 중심부에 모여야 가능했던 일을 해낸다. 자리가 생산성을 결정하지 않는 시대라면, 사람들은 굳이 비싼 중심에 매달릴 이유가 줄어든다. 그러면 그 무겁고 일방적인 흐름, 청년이 수도권으로만 빨려 들어가는 흐름도 조금은 느슨해질 수 있지 않을까. AI가 지방 소멸의 속도를 늦춰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여기서 출발한다.
나도 그 미래를 바란다. 다만 컨설팅 현장에서 숫자와 사례를 들여다볼수록, 기대만으로 끝내서는 안 되는 질문 하나가 남는다. 거리를 지우는 기술이 정말 지방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일은 AI가 등장하기 전에도 일어났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는 오래된 약속
기술이 크게 도약할 때마다 사람들은 비슷한 꿈을 꾸었다. 이제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게 되리라는 꿈이다. 물리적인 거리가 더 이상 일과 삶을 가르지 못하고,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똑같이 기회를 누리게 되리라는 기대였다. 서구에서는 훗날 이 기대에 ‘거리의 죽음’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거리가 죽는다는 말은 곧 어디에 있느냐가 더는 운명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꿈이 처음 크게 부풀어 오른 것은 1858년,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전신 케이블이 처음 이어졌을 때다. 런던과 뉴욕이 몇 분 만에 연결되자 당대의 논평가들은 이 기술이 국가 간 경쟁을 끝내고 세계를 하나로 묶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적었다. 물리적 거리가 무너지면 인류가 그만큼 평등해지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전신이 실제로 한 일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정보와 결정권은 중심부로 모였고, 흩어져 있던 외교 공관들은 본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멀리 떨어진 곳을 가깝게 이어준 기술은 권력을 흩어 놓은 것이 아니라 중앙으로 빨아들였다.
20세기의 전화도 같은 약속을 되풀이했다. 전화가 도시를 해체하고 사람들을 한적한 곳으로 돌려보내리라는 예측이 쏟아졌는데, 한 연구자가 훗날 정리한 그 예측의 목록은 수십 년 뒤 인터넷을 두고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와 거의 똑같았다. 1997년 한 영국 언론인은 아예 그 ‘거리의 죽음’을 제목으로 내건 책에서 통신 혁명이 이제 위치를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라 선언했고, 비슷한 시기 빌 게이츠를 비롯한 이들은 재택근무가 폭발하며 집과 일터의 경계가 사라질 것이라 내다봤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한 경제학자는 정반대 질문을 던졌다. “도시는 정말 죽어 가고 있는가?”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대답은 단호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도시는 오히려 강해진다는 것이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면 접촉을 타고 퍼지는 한, 그 접촉이 가장 빽빽하게 일어나는 도시의 값어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정보통신 기술은 경제 활동을 지방으로 흩어 놓을 것이라던 예측을 비웃듯, 도시는 원격으로 할 수 있는 일자리마저 끌어당겼고 지방은 뒤로 밀렸다. 화면 너머의 세계에서도 모이는 힘의 원리는 그대로 작동했다.
이 긴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바는 분명하다. 장소를 무의미하게 만들겠다는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분산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늘 집중이었다. AI 에이전트는 그 계보의 가장 최근 항목이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말하려면, 그 입증의 책임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쪽에 있다.
코로나가 치른 거대한 실험
가설을 검증할 기회는 이미 한 번 크게 주어졌다. 코로나19는 인류가 치른 가장 대규모의 원격근무 실험이었다. 사무실에 모이지 않고도 일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강제로 학습했다. 어디에 있느냐가 정말 무의미해졌다면, 사람들은 그때 중심을 떠나기 시작했어야 한다.
한국의 통계는 정반대를 가리킨다. 수도권 인구 비중은 2020년에 처음으로 비수도권을 앞질렀고, 그 뒤로도 꾸준히 커져 2052년에는 53퍼센트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수도권은 2017년부터 여덟 해 연속으로 순유입을 기록했다. 떠난 사람보다 들어온 사람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원격근무가 한창이던 2020년 봄, 수도권으로의 순유입은 오히려 폭증해 전년 같은 기간의 열 배에 가까웠고, 그 대부분이 일자리와 학업을 좇아 올라온 이십 대였다. 위치가 무의미해지기는커녕,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중심으로 모였다.
지자체들이 의욕적으로 내놓은 워케이션은 어떤가. 일하면서 휴양한다는 이 개념은 한때 지방 소멸의 대안으로 각광받았지만, 구조를 들여다보면 위태롭다. 강원도를 찾은 워케이션 기업은 2024년 522곳, 참여자 삼천여 명에 이르렀다가 이듬해에는 61곳, 구백여 명으로 급감했다. 지자체 지원이 줄면 기업 참여가 곧바로 식어 버리는 취약한 구조라고 담당자 스스로 토로했다. 잠깐 머물다 떠나는 유동 인구는 늘릴 수 있어도,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갈 상주 인구로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보여주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정주로 연결되지 못하는 행사가 반복되는 동안, 한국고용정보원의 소멸위험지수로 분류한 소멸 위험 지역은 2002년 네 곳에서 2024년 백스물아홉 곳, 전체 시군구의 절반을 넘는 규모로 늘었다.
같은 위기, 다른 속도로 도착하는 경고음
여기서 지자체와 기업 대표들의 인식 차이를 이야기하려면 조심스러워야 한다. 지방의 경영자가 둔하다거나 위기를 모른다는 식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내가 현장에서 만난 지방 기업 대표들 가운데는 수도권의 누구보다 절박하게 변화를 고민하는 분들이 많다. 문제는 경각심의 유무가 아니라, 경각심을 일으키는 신호가 도착하는 속도와 밀도다.
수도권에서 회사를 운영하면 위기 신호가 사방에서 들어온다. 옆 건물에서 무료 AI 실무 교육이 열리고, 거래처가 어느새 에이전트로 업무를 자동화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새로 들어온 직원이 먼저 새로운 도구를 들고 온다. 환경 자체가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다. 반면 산업 기반이 제조업의 2차, 3차 협력사에 몰려 있고 트렌드에 민감한 업종이 드문 지역에서는 같은 신호의 밀도가 현저히 낮다. 똑같이 다가오는 위기인데,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한쪽에는 매일, 다른 쪽에는 가끔 도착한다. 이것은 능력이나 의지의 격차가 아니라 정보 환경의 격차다.
그런데 그 차이는 곧 실력의 격차로 굳는다. 한 분석에 따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AI 도입 비중 격차는 2023년 4.7퍼센트포인트에서 2025년 45.7퍼센트포인트로 벌어졌다. 2년 만에 거의 열 배다. 자본과 데이터가 앞선 쪽이 먼저 도입하고, 도입한 쪽이 생산성으로 다시 앞서가는 구조다. 지역과 규모의 불리함이 겹치는 지방 중소기업은 이 격차의 가장 깊은 자리에 놓인다. 경북의 한 부자재 기업은 일찍 지능형 공장에 투자하고도 지역에서 AI 엔지니어를 구하지 못해 한참을 애먹었고, 부산의 한 부품업체는 컨설팅을 받고 나서야 정작 AI에 먹일 데이터가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를 받쳐 줄 사람과 인프라가 곁에 없었던 것이다.
교육이 가장 두꺼운 곳과 가장 얇은 곳
여기서 우리는 묘한 역설과 마주친다. AI를 다루는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이 가장 두껍게 깔린 곳은, 이미 AI에 가장 많이 노출된 수도권이다.
강남구는 2021년부터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AI를 아우르는 직업훈련 아카데미를 매년 운영한다. 수강료는 무료이고, 출석을 일정 수준 채우면 매달 훈련장려금까지 준다. 송파구는 챗GPT 기반의 행정 AI 시스템을 서울 자치구 가운데 처음으로 내부 업무망에 올리고 전 직원 교육에 들어갔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청년취업사관학교는 스물다섯 개 자치구 전체로 캠퍼스를 넓히면서 교육과정을 통째로 AI 중심으로 갈아엎었고, 송파에 들어선 캠퍼스가 스물한 번째였다. 이 교육들은 대부분 무료이고, 사업을 맡을 민간 교육기업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끝없이 경쟁한다. 강남 테헤란로 일대에 AI 기업교육 간판이 빼곡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정작 이 교육이 가장 절실한 지방은 어떤가. 물론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지자체가 없지는 않고, 중앙정부 차원의 지역 AI 전환 사업도 시작됐다. 그러나 강남구나 송파구처럼 매년, 상시로, 서로 경쟁시키며 교육 생태계를 굴리는 곳을 지방에서 몇 군데나 꼽을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어떤 곳은 제대로 된 실무 교육 프로그램이 단 하나도 없다. 기술이 격차를 좁혀 주리라 기대했는데, 그 기술을 다루는 능력의 분배는 기존의 격차를 그대로 따라가거나 오히려 더 벌리고 있다. 가장 좋은 도구가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늦게 도착하는 셈이다.
지방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다
지방 소멸을 지방의 일로만 보면 본질을 놓친다. 청년이 수도권으로 몰릴수록 주거비와 경쟁 압력이 결혼과 출산을 뒤로 미루게 만들고, 그렇게 낮아진 출산율은 다시 전국의 인구 기반을 깎는다. 한국은행은 청년이 빠져나간 지역이 노동 공급 감소와 성장 잠재력 약화를 함께 겪는다고 분석했다. 수도권 한 곳만 비대해지는 구조는 결국 그 수도권까지 포함한 나라 전체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비어 가는 지방은 언젠가 우리 모두가 함께 치러야 할 비용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AI 기술이 이 거대한 물살을 단숨에 되돌려주기를 바라면서도, 역사가 들려주는 경고를 함께 기억하려 한다. 전신도 전화도 인터넷도 물리적 거리를 지워 사람을 흩어 놓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힘과 사람을 중심으로 빨아들였다. 기술은 분산의 가능성을 열어 줄 뿐, 분산 자체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일본 도쿠시마의 작은 마을 가미야마가 IT 기업의 위성 사무실을 끌어들여 되살아난 것은 초고속 통신망이라는 인프라와 외지인을 받아들이는 개방성, 그리고 그것을 설계한 사람들의 의지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그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코로나가 원격근무라는 거대한 실험을 치르는 동안에도 우리 사회는 그 가능성을 분산으로 바꿔 내지 못했다. 워케이션은 지원금이 끊기면 함께 사그라드는 행사로 남았고, 청년들은 여전히 일자리를 따라 수도권으로 향했다. AI 시대라고 해서 이 결과가 저절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기술이 지방을 살릴 수 있느냐고 묻는 대신, 그 기술을 다룰 역량을 우리는 어디에 먼저 심을 것이냐고 물어야 한다. 가장 좋은 도구가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늦게 닿는 지금의 순서를 그대로 둔다면, AI는 지방 소멸을 막는 힘이 아니라 격차를 한 단계 더 벌리는 힘으로 기록될 것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아직 우리가 그 순서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칼럼은 [AI와 인간 사이] 시리즈의 열한 번째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이디오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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