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과가 삼성과를 이겼다.” 올해 입시 시즌, 부모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돌던 말이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에 가깝다. 올해 정시에서 이른바 ‘삼전닉스’ 반도체 계약학과의 합격선은 서울대 자연계를 넘어섰고, 의대 문턱까지 바짝 따라붙었다. 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를 잇던 선호 서열에 ‘반(반도체)’이 새로 끼어들어 ‘의치한약수반’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입시 설명회와 부모 단톡방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술렁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곱씹을수록 한 가지 질문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지금 그 줄에 선 아이가 정작 사회로 나설 10년 뒤에도, 그 간판은 여전히 빛나고 있을까.
◇ 인기 학과는 아이의 미래가 아니라 부모의 불안을 대변하는 지표다.
![[에이-아이랑] 의치한약수반- 신입단원 [반도체학과]의 간판 앞에서 1 image 2](https://aimatters.co.kr/wp-content/uploads/2026/06/image_2.jpg)
숫자만 놓고 보면 이 쏠림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올해 정시에서 SK하이닉스와 손잡은 계약학과 세 곳의 평균 합격선은 96.7점으로 삼성전자 계약학과 두 곳의 95.5점을 앞질렀고, 경쟁률도 31대 1과 18대 1로 제법 벌어졌다. 한양대 반도체공학과는 백분위 98점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비단 반도체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서울 스무 개 대학의 AI 관련 학과 정시 지원자는 불과 2년 사이 3,069명에서 4,896명으로, 60% 가까이 불어났다.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입사가 보장되고 취업난이 일상이 된 시대에 이만한 안전판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불안한 부모가 가장 확실해 보이는 패에 베팅하는 마음을, 나는 탓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다만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건 그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방향성이랄까. 바다 건너에서는 정반대의 움직임이 한창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내놓은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는 2030년까지 직무에 필요한 핵심 역량의 39%가 통째로 갈릴 것이라 내다봤다. 그러면서 기업들이 가장 중요하게 꼽은 능력으로 특정 전공이나 자격증이 아니라 분석적 사고, 그리고 회복탄력성과 호기심을 나란히 들었다. 실제로 구글과 IBM, 테슬라 같은 기업은 채용 공고에서 학위 요건을 조용히 지워가는 중이고, 지난해 미국에서는 학위 조건을 없앤 기업이 한 해 만에 77%나 늘었다. 무엇을 전공했느냐보다 무엇을 할 줄 아느냐를 보겠다는 흐름이다. 우리가 그토록 매달리는 간판의 유효기간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짧아지고 있다는 신호인 셈이다.
◇ 간판은 바뀌어도, 끝까지 붙들고 가는 사람의 힘은 남는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도 반도체 수요는 눈에보이고, 하이닉스과에 들어가면 당장 취업이 되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다만 한 발 물러서서 보면, 우리가 아이 손에 쥐여주려는 것은 늘 ‘지금 가장 잘 나가는 간판’ 하나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그 자리는 코딩이었고, 다음은 AI , 반도체이고. 이렇게 또 몇 해 뒤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바뀌는 간판에서도 중요한 것은 , 어떤 간판이든 끝까지 붙들고 가는 사람의 힘. 그것이 가장 중요한것 아닐까.
스타트업씬에서 10년이 넘게 버텨오면서 어제의 전략과 계획을 오늘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일을 거의 매일같이 한것 같다. 시장이 한 번 출렁일 때마다 어렵게 쌓아 올린 성공의 방식을 미련 없이 접고, 익숙하지 않은 분야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기도한다. 그 길고 지루한 오르내림 위에서 끝내 사람을 버티게 한 건 남보다 뛰어난 재능도, 손에 쥔 특정 기술도 아니었다. 오히려 잘 풀리지 않는 날에도 다음 날 아침 다시 책상 앞에 앉게 만드는, 끈질김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심리학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이것을 ‘그릿(grit)’이라 불렀다. 번뜩이는 재능이 아니라,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오래도록 식지 않는 열정과 끝까지 밀고 나가는 끈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더크워스가 이 개념을 발견해낸 곳은 다름 아닌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였다. 혹독하기로 악명 높은 신입생 여름 훈련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생도가 누구인지를 가장 정확히 가려낸 변수는 지능도, 체력도, 리더십도 아닌 그릿이었다고 한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끝까지 가는 사람이 남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릿 하나로 모든 성취가 설명되지는 않으며, 그 뒤의 연구들은 인지 능력 같은 다른 요인의 무게도 함께 짚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무엇을 손에 쥐고 시작하느냐보다 그것이 흔들릴 때 다시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느냐가 길게 보면 훨씬 결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WEF가 미래의 핵심 역량으로 분석적 사고와 호기심을 꼽으면서, 성장하는 직업과 사라지는 직업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로는 다름 아닌 회복탄력성과 유연성을 지목한 것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다른 말로 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끝까지 가는 힘은, 명문 학과의 합격증 한 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작은 실패를 안전하게 겪어보고 그 실패가 결코 끝이 아니었음을 거듭 확인하는, 더디고 사소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야 비로소 길러지는 까닭이다.
◇ 아이에게 남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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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의 그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입시 철마다 부모들의 단체 대화방을 가득 채우는 물음은 한결같이 “그래서 어느 과를 보내야 하느냐”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던져야 할 질문은 조금 다른 자리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간판을 다느냐가 아니라, 그 간판이 빛바랜 어느 날에도 다시 배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아이인가 하는 물음 말이다. 미래가 어떤 얼굴일지는 사실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잠깐 반짝이는 간판 하나보다 어떤 변화 앞에서도 끝내 버텨낼 인지적·심리적 기초체력을 손에 쥐여주는 편이, 결국은 아이를 가장 멀리 데려다주는 길이 아닐까.
이미지 출처: AI 생성 콘텐츠
![[에이-아이랑] 의치한약수반- 신입단원 [반도체학과]의 간판 앞에서](https://aimatters.co.kr/wp-content/uploads/2026/06/Lee-Hyelin-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