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완벽해지는 AI,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AI가 기술적으로 완벽해지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는 우리 인간의 선택과 관계, 정서 그리고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초안을 쓰는 일은 시간과 노력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AI가 대신 그 일을 하게 되자, 더 이상 빈 화면 앞에서 첫 문장을 고민하던 그 시간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초안을 거의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꽤 흥미로운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신사업 아이디어를 한 달째 고민 중인 한 창업자는, AI가 써준 수십 개의 초안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결국 절반 가까이를 지우고 다시 썼다.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건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 팀 이야기 같지가 않아서요.”
이 장면은 최근 우리가 AI와 함께 일하는 방식의 변화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AI는 이제 오차 없는 문장, 정돈된 논리, 흠잡을 데 없는 기획안을 순식간에 만들어낸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그 완벽한 결과물 앞에서 무언가를 자꾸 고쳐 쓰고 싶어 한다. 이 현상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도 아니고, AI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완벽함을 대하는 인간만의 태도가 AI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완벽주의를 조금 다르게 읽는다. 언뜻 신중함처럼 보이지만, 실은 실패를 마주하지 않으려는 정교한 회피에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실행에 옮기는 속도가 느리고, 무언가를 끝까지 완수해 내는 비율도 낮다는 연구들이 있다. 마지막 몇 퍼센트를 붙잡고 있는 사이, 정작 시작 자체가 무산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은 조금 다르다. AI가 이미 그 마지막 몇 퍼센트, 아니 어쩌면 구십 퍼센트 이상을 순식간에 채워주고 있다. 완벽함을 향한 기다림이라는 오래된 장벽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감각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채워지지 않은 감각의 정체는 아마도 이것이다. 무결점의 결과물은 우리를 안심시킬 뿐, 우리를 그 일에 계속 붙들어 두지는 못한다는 것.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는 완결된 일은 쉽게 잊어버리는 반면, 완료하지 못한 일은 계속 기억하게 되는 인간의 경향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심리학자 블루마 자이가르닉(Bluma Zeigarnik)이 발견한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가 여기서 다시 떠오른다. 인간은 완결된 일보다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더 오래 기억하고, 그 미완의 긴장이 우리를 계속 그 일 앞으로 데려간다는 개념이다. AI가 건넨 매끄러운 초안을 절반쯤 지우고 다시 쓰던 그 창업자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자신만의 열린 고리(open loop)를 다시 만들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그의 책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 2011)》에서 인간의 사고를 두 가지 체계로 설명한다.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 1’과 느리고 분석적인 ‘시스템 2’다. 모든 데이터가 초록불을 켜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면, 그것은 근거 없는 불안이 아니라 시스템 1이 먼저 감지해 낸 맥락적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시스템 1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작동하는 ‘직감’에 가깝다. 낯선 사람의 표정에서 위험을 감지하거나, 잘 정리된 계약서를 읽으면서도 왠지 모를 찜찜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시스템 1의 작동이다. 반면 시스템 2는 숫자를 계산하고, 근거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결론을 내리는 느리고 신중한 사고 과정이다. 문제는 시스템 2가 아무리 완벽한 데이터를 확인해도, 시스템 1이 먼저 붙잡아낸 위화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낄 때, 그것은 감정이 논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또 하나의 판단이 먼저 도착한 것에 가깝다.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의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 2011) — 시스템 1과 시스템 2 개념이 처음 소개된 책이다.
AI는 축적된 데이터의 통계적 정합성을 따라 결론을 내리지만, 인간은 그 데이터가 미처 담지 못한 미묘한 변화의 낌새를 읽어낸다. 실제로 혁신적인 의사결정의 상당수는 정교한 분석이 아니라 이런 직관적 통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직관은 일하는 태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요즘 나는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에서도 비슷한 변화를 본다. 앞서 그 창업자 역시 스스로를 ‘마케터’나 ‘기획자’라는 직함으로 소개하는 대신, 자신이 어떤 문제를 발견했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사회학자 셸던 스트라이커(Sheldon Stryker)의 역할 정체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특정한 역할에 갇힐수록 스스로의 가능성을 그 틀 안에 제한하게 된다는 걸 밝혔다. 반면, 심리학자 댄 맥애덤스(Dan McAdams)가 제안한 이야기 정체성 이론(Narrative Identity Theory)은, 사람이 타인을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맥락 있는 서사로 이해할 때 더 오래 기억하고 더 깊이 신뢰한다고 말한다.
AI는 대상을 손쉽게 하나의 범주로 나눠버리지만, 우리 인간은 그 범주 안에 갇히지 않고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다.
그 창업자의 보고서는 결국 회의에서 그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 몇 가지 수정보완 사항이 논의되었고, 다음 주까지 조금 더 다듬어보기로 했다. 완벽하게 정리된 초안이 아니라, 여전히 열려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은 것이다.
AI가 무결점을 향해 매끄럽게 수렴하는 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미완성의 긴장을 견디며 조금씩 고쳐 쓰고, 데이터가 답하지 못하는 찜찜함에 직관으로 방향을 틀고, 완벽이 아니라 계속되는 미완의 이야기로 남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초안을 뽐내는 게 아니라, 언제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여지를 되도록 많이 남겨둘 용기일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 이디오그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