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목에 있는 나비 넥타이가 날아가고, 우아한 버뮤다 밴츠에서 꽃이 피어났습니다. 언뜻 봐도 AI 콘텐츠인 이 영상은 AI 기반 디지털 아티스트 릭딕(@rickdick)의 작품인데요. AI 영상의 원본 영상은 조나단 앤더슨이 처음으로 선보인 디올(Dior)의 첫 번째 컬렉션에서의 워킹 장면들입니다.
조나단 앤더슨은 JW 앤더슨을 설립하고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친 디자이너입니다. 앤더슨도 시대에 따라 컬렉션의 형태가 바뀌었는데요. 독특한 소재 활용과 젠더리스한 실루엣 정도가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히 잔디를 갓 뽑아 박음질을 한 듯한 코트나, 마인크래프트의 픽셀을 옷에 옮긴 듯한 2023 S/S 컬렉션은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올해 컬렉션 역시 대호평을 받았는데요. 빅토리아 시절에나 볼 법한 니트 위 보 타이, 신사복 아래의 형광색 슈즈, 치렁치렁 늘어지는 버뮤다팬츠에서 느껴지는 근현대 유럽의 복식을 두고 패션지들은 “이것이 바로 패션이다”라는 호평을 쏟아냈죠. 해체주의 장난질에 지친 소비자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는 한마디였습니다. 그 소년다움이 물씬 풍기는 고풍적이고 현대적인 룩은 앤더슨이 ‘옛날 것’에 얼마나 가치를 심오하게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AI 영상을 리포스트하다뇨?
사실 릭딕은 앤더슨의 디올 컬렉션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비가 날고, 꽃이 피어나고, 무당벌레가 기어가는 장면은 서정적이고도 위트있었죠.
물론 모든 장면이 우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들고 있는 가방이 깨지거나, 모델들이 펀치(대신 꽃)를 맞는 장면은 현시점 소셜 미디어에서 핫한 콘텐츠들이기도 하죠. 원본에서는 민들레 홀씨를 우아하게 부는 장면은 홀씨를 먹고 죽는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무려 디올 폰트로 ‘Die’라는 문구를 넣으면서요. 놀라운 장면이긴 하지만 비교적 젊은(1984년생) 디자이너 앤더슨이 받아들이기에는 역겹거나 괴로운 장면은 아니었을 겁니다.
현재까지 AI 아트는 특유의 부정확한 동작 때문에 불쾌감을 유발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릭딕처럼, 브랜드 본연의 가치를 잘 알고 패러디하는 콘텐츠들은 앞으로 ‘AI 영상이라고 해도’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예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