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1일, 한국인공지능협회에서 진행하는 CAIO(Chief AI Officer) 아카데미에서 한재권 교수(에이로봇 대표)가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의 현황과 전망을 제시했다. 그는 과거 산업혁명의 패턴에 비교하며 휴머노이드 로봇이 스마트폰과 유사한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을 제시했다.
인구절벽이 촉발한 로봇 수요
한 교수는 한국의 심각한 인구 구조 변화를 지적했다. 2024년 신생아 수는 24만6천 명으로, 1970년 100만 명 대비 4분의 1 수준이다. “2045년이 되면 25만 명의 생산인구가 100만 명의 고령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를 극복할 해법으로 휴머노이드 로봇을 제시했다.
실제로 국내 제조업 현장은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중소 제조업체들은 근로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이는 휴머노이드 로봇 도입의 주요 동인이 되고 있다.

한국 로봇 R&D의 역설: 기술 성공, 사업 실패
한 교수는 한국 로봇 산업의 독특한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나라 R&D 과제 성공률은 97%가 넘습니다. 미국이 20~30%인 것과 대조적”이라며, “청소, 서빙, 배송 등 안 해본 로봇이 없지만 대부분 사업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진단했다.
정부 R&D 과제로 수천 개의 로봇이 개발됐으나, 상용화에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기술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투자수익률(ROI)을 확보하지 못해 사업화에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서빙 로봇, 배송 로봇, 협동 로봇 등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한 교수는 이들의 공통점을 “하루 종일 움직이며 지속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으로 분석했다. 단일 작업 완료 후 유휴 상태가 되는 로봇은 ROI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휴머노이드가 ‘다목적성’을 추구하는 이유
“휴머노이드 로봇이 인간 신체와 유사하게 만들어진 이유는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들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다목적성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한 교수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인간형 설계가 미학적 선택이 아닌 기능적 필연임을 강조했다.
인간 문명의 모든 환경은 인간의 신체 구조에 최적화되어 있다. 문, 계단, 작업대 높이, 도구의 손잡이까지 인간의 손과 팔 길이에 맞춰 설계됐다. 따라서 다양한 환경에서 여러 작업을 수행하려면 인간형 로봇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논리다.
일론 머스크가 바꾼 산업 지형
2021년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를 ‘AI 로봇 회사’로 규정하며 옵티머스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당시 회의적 반응이 많았으나, 4년 만에 실제 작동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을 공개하며 업계를 변화시켰다.
테슬라의 강점은 십수 년간 축적한 자율주행 기술이다. “카메라로 상황을 판단하고 모터를 제어하는 기술, 이것이 휴머노이드 로봇의 핵심입니다”라고 한 교수는 설명했다.
테슬라가 AI부터 하드웨어, 공장까지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동안, 업계는 연합 전선을 구축했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는 피겨AI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고, 피겨AI는 창업 3년 만에 기업가치 50조 원을 인정받았다. 구글은 보스턴다이내믹스와 협력해 자체 딥마인드 AI를 로봇용으로 개발 중이다.
엔비디아는 아이작심 시뮬레이터와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환경을 제공하며 여러 휴머노이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한 교수는 “테슬라는 혼자 다 하는 반면,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많은 기업들이 연합을 형성했다”며 “애플 대 안드로이드 진영의 구도와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생성형 AI가 해결한 ‘프로그래밍 불가능’ 문제
휴머노이드가 오랫동안 실현 불가능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인간의 직업은 약 30만 종에 달하며, 이를 일일이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제작 비용도 장벽이었다. 40여 개의 고가 모터가 필요해 재료비만으로도 상당한 금액이 소요됐다.
하지만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상황이 변했다. 한 교수는 “사람이 VR 기기로 동작을 시연하면 이를 데이터화하고, 엔비디아의 아이작 심(Isaac Sim) 시뮬레이터에서 로봇 수천 대를 동시에 훈련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루 5만 개의 학습 데이터를 생성할 수 있어, 이틀이면 AI 학습에 충분한 10만 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모방 학습(Imitation Learning)’이라고 하는데, 현재 주요 휴머노이드 업체들이 채택한 방식이다. 시뮬레이터에서 데이터를 증폭시킨 후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을 파인튜닝하면, 실제 현장에서 로봇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이 주목받는 이유: 제조 데이터의 보고
한 교수는 최근 글로벌 AI CEO들의 잇따른 한국 방문 배경을 제조업 생태계로 분석했다. “피지컬 AI를 개발하려면 다양한 제조업 현장의 데이터가 필수적입니다.”
중국은 제조업 데이터가 풍부하지만 미국 기업의 접근이 제한적이다. 일본은 디지털 전환이 더디고, 독일은 제조업 기반이 약화됐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다양한 산업단지가 활발하게 운영되며, 높은 집적도를 자랑한다.
더욱이 한국 제조업체들은 심각한 인력난으로 로봇 도입 수요가 높다. 이는 AI 기업 입장에서 현장 데이터 확보와 실증 테스트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정부 주도로 결성된 ‘K-휴머노이드 연합(현 휴머노이드 맥스 얼라이언스)’은 출범 몇 개월 만에 244개 기업이 참여하는 대규모 생태계로 성장했다. 배터리, 반도체 등 핵심 부품을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완결된 공급망을 갖춘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에이로봇 엘리스, 상용화 단계 진입
한 교수가 이끄는 에이로봇의 휴머노이드 ‘엘리스’는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난 10월 지드래곤 월드투어 VIP 행사에서 엘리스가 서빙 로봇으로 투입돼 밤새 하이볼을 서빙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바퀴형 모델인 ‘엘리스 M1’은 6천~7천만 원에 판매가 시작됐으며, 12월부터 실제 공장에 투입될 예정이다. 교환식 배터리를 채택해 이론상 무제한 작업이 가능하다.
이족보행 모델은 조선 3사(HD현대,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및 포스코건설과 협력해 건설·조선 현장 투입을 준비 중이다. 3년 후 목표 가격은 4만7천 달러(약 6천5백만 원)로, 외국인 노동자 연봉 수준이다.
혁명의 패턴: 범용 기계 + 리더 + 사용자의 상상
한 교수는 과거 산업혁명들의 공통 패턴을 제시했다. “범용 기계가 있고, 그것을 끌고 나가는 리더십이 있으며, 사용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냅니다.”
스마트폰이 대표적 사례다. 2010년 당시 스마트폰은 전화, 카메라, 음악 플레이어 등 여러 기능을 통합한 범용 기기였다. 명확한 단일 목적이 없었지만, 사용자들은 이를 활용해 내비게이션(지도 앱), SNS(페이스북), 동영상 플랫폼(유튜브) 등을 만들어냈다.
“2010년에는 스마트폰이었다면, 2025년에서 2030년 사이에는 휴머노이드 로봇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플랫폼을 활용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시장 전망: 2035년 자동차 산업 규모 돌파 예상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글로벌 투자기관들은 휴머노이드 시장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일부 기관은 2035년 휴머노이드 시장이 자동차 산업 규모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중국 휴머노이드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한 교수는 “중국 로봇들의 가격이 매년 절반으로 떨어지고 있다”며 “작년에는 수익이 안 나던 서비스가 올해는 비용 절감으로 수익이 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현재 테슬라의 옵티머스는 2023년 BMW 공장 투입을 시작으로 실증을 확대하고 있다. 피겨AI는 하루 천 회 작업 수행 등 구체적 성과를 발표하며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현대차그룹과 협력해 조지아 공장 투입을 계획 중이다.
휴머노이드 로봇 관련 부품 산업에 주목
한 교수는 부품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휴머노이드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좋은 부품들이 모여야 좋은 제품이 나옵니다.”
그는 배터리, 반도체, 액추에이터를 3대 핵심 부품으로 꼽았다. “어떤 회사가 휴머노이드용 배터리를 잘 만드는가, 어떤 반도체 회사가 추론형 칩을 잘 만드는가, 어떤 회사가 휴머노이드형 액추에이터를 잘 만드는가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 배터리와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어, 후방 산업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분석이다.
한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2025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PoC(개념증명)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며 “누가 더 많은 일을 하는가가 승부처”라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