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불편한 미래
매년 1월,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 CES에서는 화려한 신제품들이 쏟아진다. 수십 개의 제품이 혁신상을 받으며 박수를 받는다. 하지만 조금 특별한 시상식도 함께 열린다. 수리 전문 단체 iFixit과 소비자 권리 단체 Repair.org, 디지털 권리 옹호 단체 EFF(전자프론티어재단)가 공동으로 선정하는 ‘최악의 제품(Worst in Show)’ 시상식이다.
이 제품들은 단순히 성능이 나쁜 게 아니다. 한 번 사면 버리기도, 고치기도 어려운 ‘영원한 짐’이 되는 제품들이다. 단순히 최악의 제품으로 단정 짓기보다는 조금은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퍼플렉시티를 활용해 각 제품의 ‘장기 짐 지수(High Long-term Burden Scores)’를 평가했다. 수리 어려움(40%), 고장·폐기 위험(30%), 소프트웨어·구독 의존성(30%)을 기준으로 한 종합 점수다.
1. 삼성 ‘Family Hub 냉장고’: 냉장고가 망가지면 음식도 못 보관한다 (짐 지수: 9.5/10)
냉장고의 본질은 무엇일까? 음식을 차갑게 보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의 Family Hub는 여기에 거대한 터치스크린, 음성 인식 시스템, 인터넷 연결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다. 문제는 이 ‘똑똑한’ 기능들이 고장 나면 냉장고 기능에 접근하거나 제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스크린이 먹통이 되거나 소프트웨어가 업데이트를 거부하면, 기본적인 온도 조절조차 복잡해질 수 있다. 수리비? 일반 냉장고의 몇 배가 될 수 있다. 부품을 구하기도 어려울 수 있고, 설령 구한다 해도 전문 기술자가 필요할 것이다.
냉장고에 AI를 넣으면 편리할까? AI가 진정으로 유용하려면 핵심 기능과 분리되어야 한다. 냉장고는 냉장만 하면 된다.
2. 아마존 ‘Ring AI’: 당신의 이웃을 감시합니다 (짐 지수: 7.5/10)
현관문 앞에 설치하는 초인종 카메라. 언뜻 보면 방범용으로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아마존 Ring의 최신 버전은 얼굴 인식 AI를 탑재했고, 심지어 이동식 감시 타워까지 선보였다.
이게 왜 문제일까? 당신뿐 아니라 택배 기사, 지나가는 이웃, 집 앞을 산책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녹화되고 분석된다. 이 데이터는 아마존 서버로 전송되며, 제3자 앱과도 공유될 수 있다. 데이터 유출이 발생하면? 당신 집 앞 CCTV 영상이 누군가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 “더 많은 감시가 더 안전하다”는 주장은 틀렸다. 오히려 더 많은 감시는 더 많은 위험을 만들 수 있다. AI 얼굴 인식이 잘못된 사람을 범죄자로 지목할 수도 있고, 해킹당한 카메라는 범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3. 메라치 ‘UltraTread 트레드밀’: 운동 기록이 해커에게 넘어간다 (짐 지수: 8.2/10)

AI 피트니스 코치가 달린 러닝머신. 심박수, 운동 패턴, 체력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운동을 제안한다고 한다. 문제는 제조사의 프라이버시 정책에 완전한 보안 보장이 불가하다는 취지의 문구가 적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러닝머신은 집 Wi-Fi에 연결되므로, 만약 해킹이라도 당한다면 당신의 건강 데이터뿐 아니라 홈 네트워크에 보안 위협이 될 수 있다.
AI 코치가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내 건강 정보의 보안을 내가 직접 떠안고 가야 한다면 이건 정당한 거래가 아니라 착취다.
4. 라바 ‘Lollipop Star’: 60분 쓰고 버리는 전자 사탕 (짐 지수: 6.5/10)
LED가 반짝이는 막대사탕. 아이들 생일 파티용 장난감이다. 문제는? 충전할 수 없는 일회용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다. 60분 깜빡이다가 끝이다. 그다음엔 전자 폐기물이 된다. 더 심각한 건, 이 배터리가 폐기물 처리 시설에서 화재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리튬 배터리는 압축되거나 손상되면 발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의 즐거움을 위해 환경에 영구적 짐을 남기는 제품이다.
이 제품에 AI는 없다. 하지만 “최악의 제품” 리스트에 포함된 이유는 분명하다. 기술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는 것, 특히 일회용으로 설계된 전자제품은 재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5. 보쉬 ‘보쉬 800 AI 바리스타’: 커피머신과 대화하고 싶으세요? (짐 지수: 7.9/10)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는데, 커피머신이 말을 건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기분은 어때요?” 이게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보쉬의 AI 바리스타는 음성 어시스턴트를 내장했고, 일부 기능은 구독제다. 커피를 내리는 기본 기능은 무료지만, 부가적인 AI 추천이나 개인화 설정 등은 구독제로 제공하는 구조다.
모든 제품에 AI를 넣는 게 혁신일까? 아니다. 때로는 단순한 게 최고다. 버튼 하나로 커피 나오는 머신이 왜 나쁜가? AI는 문제 해결 도구여야지, 문제 자체가 되어선 안 된다.
6. Lepro ‘AI 소울메이트 Ami‘: 항상 켜진 감시 카메라 (짐 지수: 7.2/10)
책상 위에 놓는 귀여운 로봇. 카메라와 마이크가 항상 켜져 있고, AI가 당신의 표정과 목소리를 분석해 “소울메이트”처럼 대화한다고 광고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재택근무 중 화상회의를 한다. 가족과 사적인 대화를 나눈다.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들. 이 모든 게 녹음되고 분석될 수 있다. 제조사는 “커튼 기능”으로 카메라를 가릴 수 있다고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내 행동반경 내에서 많은 것들을 파악하고 개인화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처음부터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는 문제부터 시작된다?
AI를 “친구”나 “소울메이트”로 포장하는 건 위험한 마케팅이다. 진짜 친구는 당신을 감시하지 않는다. 진짜 친구는 당신의 데이터를 서버에 전송하지 않는다.
똑똑한 제품이 아니라 오래가는 제품을
CES 2026 최악의 제품으로 선정된 이 제품들은 저마다 초점이 다르지만 공통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부가 기능들 때문에 핵심 기능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불필요한 비용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이 첫 번째 문제다. 소프트웨어 잠금, 독점 부품, 지나치게 복잡한 설계로 인해 고장이 나면 통째로 버려야 할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로 이 제품들은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점이 지적됐다. 불필요한 데이터 수집과 취약한 보안으로 사용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제품은 사용자를 통제한다는 점이다. 구독제, 앱 잠금, 기능 제한으로 구매 후에도 소비자의 자유를 계속해서 빼앗는다는 이유로 최악의 제품으로 선정됐다.
AI를 활용한 관점에서 보면, AI는 잘 접목하면 분명 유용한 기술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모든 제품에 AI를 넣는다고 좋은 제품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AI는 때때로 복잡성을 증가시켜 고장 날 부분을 늘리고, 감시의 도구로 작동하며 데이터 수집을 정당화한다. 또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사용자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불필요한 기능을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마케팅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진정한 혁신은 제품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더 오래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고치기 쉽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 말이다.
다음에 “AI 탑재” 제품을 볼 때 물어보자. 이 AI가 정말 필요한가? 아니면 그냥 짐만 늘리는 건 아닐까?
※ 본 기사의 ‘장기 짐 지수’는 Perplexity와 Claude를 통해 수리 어려움, 고장·폐기 위험, 소프트웨어·구독 의존성을 임의로 평가한 점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