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84억.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한 AI 영상의 조회수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자랑이 아닙니다. 수치심입니다.
2025년 11월, 글로벌 영상 플랫폼 카프윙이 발표한 충격적인 보고서. 한국은 ‘AI 슬롭’ 소비량 세계 1위 국가로 선정되었습니다. 슬롭. 음식물 쓰레기라는 뜻이죠. AI로 대량 생산된 저품질 콘텐츠를 일컫는 말입니다.
같은 시기, 또 다른 뉴스가 있었습니다. 2026년 1월 22일, 대한민국은 세계 최초로 ‘AI 기본법’을 시행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AI 강국의 위상을 세우겠다는 야심찬 출발이었죠.
그런데 이상합니다. 세계 최초로 AI를 규제하는 법을 만든 나라가,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AI 쓰레기를 소비하고 있다니. 오늘은 이 역설적인 현실을 들여다보겠습니다.
2. 84억의 민낯
카프윙의 보고서가 공개됐을 때, 업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국 기반 AI 슬롭 채널 11개의 누적 조회수가 84억 5천만 회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2위 파키스탄이 53억 회, 3위 미국이 34억 회였으니 우리는 2위와 30억 회 이상 차이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셈이죠.
더 충격적인 건 이겁니다. 유튜브에서 추천되는 영상 5개 중 1개가 AI 슬롭입니다. 쇼츠 500개를 보면 그중 33%가 ‘브레인롯’, 즉 뇌를 썩게 만드는 영상이라는 뜻입니다.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쓰레기를 먹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쓰레기로 돈을 법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AI 슬롭 채널 한 곳, 누적 조회수 20억 회에 연간 광고 수익 추정치가 58억 원입니다. AI로 만든 가짜 영상 하나로요. 우리가 클릭할 때마다, 이 생태계는 더욱 견고해집니다.
바로 이 시점에, 정부는 규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3. AI 기본법, 무엇을 담았나
2026년 1월 22일, 정부는 한 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AI 기본법. 정식 명칭은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입니다.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죠.
법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고영향 AI’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 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AI라면 반드시 사전에 고지해야 한다는 거죠. 이건 당연해 보입니다.
둘째는 AI 생성물 표시 의무화입니다. AI가 만든 이미지든 영상이든 음성이든, ‘AI가 만들었다’고 표시해야 합니다. 워터마크를 찍든, 라벨을 붙이든, 방법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구글, 오픈AI, X 같은 해외 기업들은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그들이 만든 딥페이크는? 이 질문에 AI 기본법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4. 모호함이라는 이름의 함정
법이 시행되기 전부터 현장은 술렁였습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AI 스타트업 101곳을 조사했더니 98%가 ‘AI 기본법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법은 만들어졌는데, 지킬 준비가 안 된 겁니다. 법이 먼저 달려나갔고, 현장은 뒤에서 숨을 헐떡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AI 기본법은 ‘AI를 사용했는가’에만 집중합니다. 표시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AI 슬롭의 문제는 사용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했는가’입니다. AI로 만든 교육 영상과 AI로 만든 브레인롯 영상을 같은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AI 제작 여부가 아니라, 콘텐츠의 맥락과 의도, 사회적 해악 여부를 판단하는 기술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5. 오스카의 선택, 한국의 선택
같은 시기, 할리우드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2025년 4월, 미국 아카데미가 제98회 오스카의 새 규정을 발표했습니다. AI 가이드라인이었죠.
아카데미의 입장은 명료했습니다. ‘생성형 AI 등 디지털 도구의 사용 여부는 후보 자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평가하는 건 인간 창작자의 창의적 기여가 중심이었는지다.’
AI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아닙니다. 인간의 창의성이 중심에 있었느냐를 본다는 겁니다. 도구가 아닌 의도를, 기술이 아닌 본질을 본다는 거죠.
그렇다면 한국은? AI 기본법은 말합니다. ‘AI로 만들었으면 표시하라.’ 도구만 봅니다. 시작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이 방향이, 정말 맞는 방향인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6. 에필로그: 법보다 문화가 먼저다
84억 조회수의 AI 쓰레기를 소비하는 나라. 세계 최초로 AI 기본법을 시행한 나라. 이 둘이 같은 나라라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법이 문화를 만들 수 있는가?
AI 슬롭이 범람하는 건 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클릭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거울입니다. 우리의 선택을 비춥니다. 우리가 클릭하면, 알고리즘은 학습합니다. 클릭은 투표이고, 소비는 동의입니다.
AI 기본법의 취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법만으로 AI 슬롭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진짜 해법은 법전이 아니라 우리의 손끝에 있습니다. 무엇을 볼 것인지, 무엇에 시간을 줄 것인지. 그 선택 하나하나가 AI 시대의 문화를 만듭니다.
✒️필자 소개
생각ㅣmaverick
2023년, 국내 최초로 AI 스토리텔링 랩 ‘프롬’을 설립하고 누적 700명과 함께 AI 수업과 연구를 진행하며, MBC C&I ‘AI Contents Lab’, 한국영상대학교, 거꾸로캠퍼스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국내외 AI 스토리텔링 프로젝트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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